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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속에 핀 반지꽃 (심재순)

타인의 흔적/너와 나의 간이역엔...

by 이도화 (비닮은수채화) 2022. 4. 5.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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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란다 창가 화분에 빨갛게 핀 갈랑코에, 그 모양이 하도 예뻐서 다가가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친구 경미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린다. 나에게 귀걸이를 주고 싶다며 만나잖다. 내 손가락 사이즈를 몰라서 반지 대신에 샀다는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도시에서 직장을 다니던 고모가 휴가차 집에 오셨다. 고모는 앵두빛 알이 박힌 예쁜 반지를 선물로 주셨다. 기쁜 마음에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행여 잃어버릴까 봐 겁이 났다.

 

 하루 종일 내 손가락에서 뛰놀던 반지는 해 저문 밤에도 함께잤다. 손 씻을 때마다 만지작거리며 배시시 웃었다. 난생처음 끼어본 반지, 공부시간에도 방해하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간간이 반지를 본 친구들이 예쁘다고 말해준 것 말고는 아무 탈 없이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전히 반지를 끼고 학교에 갔다. 한참만에 등교한 짝꿍 경미가 내 반지를 보았다. 그 당시 경미는 몸이 허약해 자주 결석을 했다. 그 애는 피부가 하얗고 얼굴이 갸름했다.

 

 경미는 반지를 한 번만 껴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망설이다가 반지를 빼서 건네주었다. 반지를 받아든 그 애는 자신의 손가락에 끼곤 휭하니 복도로 나갔다. 나는 마음이 온통 반지에 가 있었다. 

 

 수업 시작종이 울리고 그 애는 교실에 들어왔지만 반지를 주지 않았다. 달라는 말이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하교 전에 주겠지 했는데 경미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깜빡 잊고 간 모양이었다. 나는 집에 들어와 빈 손가락을 보며 혼자 울먹거렸다. 가족들에게 조차 말하지 않았다. 그런 일로 뭐라고 할 사람은 없지만 그때 까지만 해도 희망이 있었다.

 

 이튿날, 다른 때보다 아침 일찍 학교에 갔다. 기다리던 그 애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나는 경미보다 반지가 더 궁금했다. 며칠이 지난 뒤에야 경미는 빙긋이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애 손을 보니 반지가 없었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니 잃어버렸다고 했다.

 

 처음에는 경미가 나를 놀려주려고 장난치는 줄 알았다. 그 애 집에 반지가 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가지고 놀다가 싫증 나면 주겠지 믿고 싶었다. 내 바람은 한순간 물거품이 되었다. 그 반지는 다시 내게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졸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소식이 끊겼다. 한 해, 두 해, 썰물처럼 밀리는 분주한 삶 속에 그 애도 반지도 까맣게 잊고 지냈다. 서른 후반부터 몇 번의 동창회를 하는 동안 경미는 보이지 않았다.  괜스레 그녀가 보고 싶었다. 물어봐도 아는 친구가 없었다. 

 

 내 나이 쉰 살이 되었다. 산과 들이 연둣빛으로 물들 즈음, 한동안 뜸했던 동창회가 열렸다. 그곳에 경미가 나타났다. 시간이 그녀만 비켜간 듯 긴 생머리에 선이 고운 몸매였다. 한눈에 봐도 멋쟁이였다. 무엇보다 건강한 모습을 보니 반가웠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가와 꼬옥 껴안았다. 기나긴 세월이 흘렀지만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어색함을 떨칠 수 있었다.

 

 스무 명이 넘은 코흘리개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앉은뱅이 식탁에 앉아 도란거리는 말소리, 아늑하고 따스한 시절을 떠올리는 표정들. 방안 가득 친구들 온기로 군불을 지핀 듯 훈훈했다.  그녀는 잦은 결석으로 누가 누군지 잘 모르겠다며 내게 속삭였다. 나는 그녀와 붙어 앉아 손짓, 몸짓을 해가며 알려주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동심으로 돌아가 깔깔대며 웃었다.  

 

 경미는 반딧불과 같이 희미한 기억 속 반지이야기에 미안하다고 했다. 이제는 다 추억이라며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그런 추억이라도 만들어줘서 고맙다며 그녀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날은 줄곧 경미와 담소를 나누었다.  숯불 위에서 노릇노릇 잘 익은 고기 한 점에도 배가 불렀다.

 

 우리는 밤 공기를 쐬러 밖으로 나왔다. 한강변 불빛을 바라보며 거닐었다.  그렇게 초여름 밤은 깊어만 갔다. 나는 경미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과 숙박을 위해 남았다. 

 

 그 후론 주로 친구들 자녀 결혼식장에서 얼굴을 보곤 했다. 경미가 식당을 하고 있었기에 늘 바빴다. 그녀 또한 흐르는 시간만큼 많은 역경을 이겨내며 살아온 것 같았다.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와 달리 풍성한 경험과 거친 삶의 에너지가 뒤섞인 사람 냄새나는 친구였다.

 

 한날은 몇몇 친구와 경미가 운영하는 식당에 초대받아 갔다. 식당 내부가 깔끔하고 멋스러웠다. 주인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 구성원은 그녀 가족들이었다. 선한 인상을 한 남편, 부모의 좋은 유전자만 물려받은 듯한 아들과 딸, 조화로운 꽃밭이었다.

 

 평소 잘 안먹는 퓨전 음식이었는데 그릇을 싹싹 비웠다. 경미는 친구들이 눈치채지 않게 은근슬쩍 나한테 다정하게 대했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곳을 나올  때쯤 친구들과 작은 봉투를 준비했다. 그녀 아들에게 용돈하라며 살짝 내밀었다. 경미는 어느새 알고 펄쩍 뛰었다.

 

 나에게 반지 사건은 먼 옛날 이야기가 되었는데 그녀는 아니었나 보다 통화 끝에 경미의 진심이 묻어나 코끝이 찡하다.

"재순아, 미안해. 어린 마음에 얼마나 속상했을까?"

"아냐. 생각해주는 네가 더 고맙다. 귀걸이는 마음만 받을게."

 우리의 졍겨운 대화를 들은 갈랑코에가 활짝 웃는다. 어릴 적 내 반지처럼 예쁘다. 그 순간 잃어버린 반지가 내 가슴 속에서 꽃이 되어 몽글몽글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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