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흔적(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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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공스님의 글 중에서...
저 번에 오른쪽 눈이 수난 겪다 좋아졌는데, 어제 저녁부터는 왼쪽 눈이 아프기 시작했다. 마이 아프다. 덕분에 연신 외눈물을 흘린다. 나는 한쪽으로만 우는 재주를 가졌다. 그릐면서 좌우 눈에서 흘리는 눈물의 연유가 따로 있을까를 생각한다. 좌우 뇌의 쓰임 조금씩 다르듯 흐르는 눈물에도 감정이 격할 때는 오른쪽 눈에서 눈물이 나는데 나오는 눈물의 양이 많다거나, 혹은 후회나 회한이나 반성 같은 감정들이 넘칠 때는 왼눈에서 분비되는 눈물의 양이 많다거나 염분의 짠 정도가 더하다거나 덜하는 거 말이다. 슬픔이나 분노, 아니면 너무 느꺼워서 절로 흘러나오는 눈물남의 근본원인에도 과중과 경도의 차이가 있을까 말이다. 무겁고 가벼움의 차이 말이다. 눈물샘은 전생에 다 흘리지 못한 이생의 참회통로라는 말. 머리카락보..
2022.06.22 -
보고 싶은 시인님에게
보고 싶은 시인님에게 창문 너머 초록으로 물든 숲이 싱그럽기만 합니다. 이파리들이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춤을 춥니다. 한가로운 오후, 문득 시인님 생각에 편지를 씁니다. 우리의 만남은 서정문학 카페에서 시작이 되었지요. 서로의 글을 읽고 댓글을 주고받으며 어느 순간 마음이 통했던 것 같아요. 며칠 전, 시인님이 보낸 카페 쪽지에 심쿵했습니다. 감성이 무뎌지는 나이에 이성도 아닌 동성에게 설레는 저 자신을 보고 웃지 않을 수 없었지요. 바로 전화 연결이 되었지만 저녁상을 차려야 했기에 금방 끊었어요.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이삼 일후에 다시 전화를 걸었습니다. 느낌 좋은 시인님 우리는 둘 다 여유가 있다는 걸 확인하고 긴 통화로 이어졌지요. 스스로도 깜짝 놀랐습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시인님과 시간 가..
2022.05.18 -
가슴 속에 핀 반지꽃 (심재순)
베란다 창가 화분에 빨갛게 핀 갈랑코에, 그 모양이 하도 예뻐서 다가가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친구 경미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린다. 나에게 귀걸이를 주고 싶다며 만나잖다. 내 손가락 사이즈를 몰라서 반지 대신에 샀다는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도시에서 직장을 다니던 고모가 휴가차 집에 오셨다. 고모는 앵두빛 알이 박힌 예쁜 반지를 선물로 주셨다. 기쁜 마음에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행여 잃어버릴까 봐 겁이 났다. 하루 종일 내 손가락에서 뛰놀던 반지는 해 저문 밤에도 함께잤다. 손 씻을 때마다 만지작거리며 배시시 웃었다. 난생처음 끼어본 반지, 공부시간에도 방해하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간간이 반지를 본 친구들이 예쁘다고 말해준 것 말고는 아무 탈 없이 지..
2022.04.05 -
거룩한 본능
거룩한 본능 / 김규련 동해안 백암 온천에서 눈이 쌓인 주령을 넘어 내륙으로 들어서면, 산수가 빼어난 고원 지대가 펼쳐진다. 여기가 겨우내 눈이 내리는, 하늘 아래 첫 고을인 수비면으로, 대구에서 오자면 차편으로 근 다섯 시간을 달려야 하는 곳이다. 마을이라고 하지만, 여기저기 산비탈에 농가가 몇 채씩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난한 자연 촌락이다. 이 근방에는 천혜의 절경이 많이 있다. 그리고 이 고장 사람들 자신이, 그 절경을 이루는 웅장한 산이며 기암절벽이며 눈 덮인 수림이며 산새며 바람 소리와 함께, 없어서는 안 될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있다. 이들의 주된 생업은 채소 농사와 담배 농사지만, 철 따라 산나물과 약초를 캐고 송이버섯을 따들이기도 한다. 어쩌면, 바보가 아니면 달관한 사람만이 살 ..
2022.03.30 -
달팽이
달팽이를 보고 있으면 걱정이 앞선다. 험한 세상 어찌 살까 싶어서이다. 개미의 억센 턱도 없고 벌의 무서운 독침도 없다. 그렇다고 메뚜기나 방아개비처럼 힘센 다리를 가진 것도 아니다. 집이라도 한 칸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싶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허술하기 이를 데 없다. 시늉만 해도 바스라질 것 같은 투명한 껍데기, 속까지 비치는 실핏줄이 소녀의 목처럼 애처롭다. 달팽이는 뼈도 없다. 뼈도 없으니 힘이 없고 힘이 없으니 아무에게도 위험이 되지 못한다. 하물며 무슨 고집이 있으며 무슨 주장 같은 것이 있으랴. 그대로 '무골호인'이다. 여리디여린 살 대신에 굳게 쥔 주먹을 기대해 보지만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다. 그렇다고 감정마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민감하기로는 미모사보다 더하다. 사소한 자극에는 ..
2022.03.30 -
별을 접는 여인
몇 해 전 일이다. 나는 어느 조그만 변두리 중학교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그때 내 자리는 어떤 여선생님의 건너편이었는데, 우리 사이에는 낡은 철제 책상이 두 개, 그리고 그 경계선쯤 되는 곳에 크리스털 꽃병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녀의 피부는 흰 편이었고 치열은 아주 가지런했다. 소리 없이 웃는 모습이 소녀처럼 해사했다. 그 크리스털 꽃병 같았다. 나는 가끔 꽃병 너머로 그녀쪽을 건너다보았다. 그 때마다 움직이고 있는 그녀의 희고 가냘픈 손이 나의 시선으로 들어오곤 했다. 색종이로 별을 접고 있었다. 공책 한 칸 넓이만큼씩 잘라 놓은 색종이를 오각형이 되게 요리조리 접었다. 접기가 끝나면 손톱끝으로 다섯 개의 귀를 살리면서 허리 부분을 살작 눌러 주면 금세 살아 통통한 예쁜 별이 태어나는 것이었다. 어..
2022.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