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숙한 눈짓/남루한 수필 흔적...(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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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용궁사
부산은 제2의 고향이다. 스물하나. 꽃다운 나이에 부모 형제를 떠나 부산에 입성. 결혼하고 아이가 태어나 13살이 되던 해에 떠나왔으니, 내 푸른 날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긴 잊지 못한 도시이다. 가난한 농가에 태어나 그토록 하고 싶던 미술 공부를 위해 돈을 벌어야겠다는 당찬 야심은, 때때산골 강원도 남자와 정분이 나는 바람에 산산이 흩어져가고 외줄 타기 하듯 어렵고 힘든 날들을 채워간 곳이라 애증도 깊고 유정하기도 하다. 아이는 어느새 청년이 되고 어느 날 결혼하고 싶다며 데리고 온 아가씨가 부산 아가씨였다. 그즈음 문현동과 대연동 사이에 살고 있었는데 지금은 사돈댁이 시댁 동네인 용호동으로 이사를 해서, 나와 부산과의 인연. 그리고 우리 아이의 배필인 며느리와의 인연은 필연인가 싶기도 하다. 만나게..
2022.08.06 -
아이들을 기다리며 ‥
엄니 쌈지에 몇 푼이라도 넣어 드려야겠기에 우체국에 가서 돈 쪼금 찾아 길 건너 아파트 옆 일요장으로 향했다. 자가용 한 대가 스르르 멈추더니, "엄마아!" 차창밖으로 내다보며 늙은 남자가 부른다. 등대 교회 앞 예배드리고 나선 할머니 몇 분들이 정답게 담소를 나누고 있다가 할머니 한분이 "엄마 칸다 엄마 칸다." "으응!" 대답한 겨자색 쟈켓 할머니가 이마에 손을 얹고 "누구 엄마? 엄마 이름?" 할머니가 재차 묻는다· " ㅎㅎ 하이고~' 박'옥'선'~!" 늙은 남자가 웃으며 또박또박 외친다. "음마야‥하하하하 까르르 호호" 겨자색 쟈켓 할머니는 멋쩍은 듯 발그레 볼 붉히며 친구분들에게 안기며 웃는다. 익어가던 소녀들의 웃음소리에 날아가던 잠자리가 흠칫 놀란다. 좁은 길을 유턴해서 차를 멈추고 아들 며..
2021.09.19 -
신묘한 이야기
오늘 밤에도 어매가 오셨으면 좋겠다 / 김재호 잠이, 오는 길이 사각사각 눈을 밟고 오는 바람처럼 그랬으면 좋겠다 어떤 날은 우당탕탕 함석지붕 두드리는 별들의 장난질에 날밤을 샌다 잠자리는 그날그날 날씨와 같아서 종잡을 수가 없다 지난밤엔 어매가 뭐라고 하시는데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생전에 통역사이던 나에게도 못하실 말씀이 있었던가 한대 얻어맞은 듯 머릿속이 텅 비었다 그곳까지 걸어서 몇 리일까 떠나실 때 신겨드린 꽃신은 벌써 닳았을 텐데 진즉 새 신 장만할걸 머리 괴면 금세 떠날 수 있으려나 이즘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시인님의 카스에 갔다가 시 구절에 나오는 꽃신에 꽂혀서 먼저 간 언니의 시동생 이야기가 생각나 몇 글자 적어본다. ' 목화꽃 연정 ' 이란 제목에 언급했던 글처럼 언니야는 뒷동네 ..
2021.09.17 -
완장
가만히 엄니께서 속삭인다. "아파트 회관에 총무가 날 보고 열쇠를 관리하라고 주더라. 야야.."" 엄니는 짐짓 들뜬 목소리다. 자꾸만 나를 주먹으로 툭툭 치면서 "그것도 아무나 주는 게 아니란다. 믿을 만한 사람이라야 주지. 어떤 할매가 옆에서 날 줘도 되는 카더라 야야.." 코로나가 법석이기 전엔 아파트 회관에 제법 할무니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외로이 홀로 아픈 몸 뒤척이는 거 보담 고만 고만한 할무니들끼리 모여 밥도 해 먹고 외식도 하고, 배달도 시키고 생일도 같이 축하해주고 어북 봉고 대절해서 맛난 거 드시러 타 지역으로도 출동하신다. 어쩌니 저쩌니 말들은 많지만, 노인복지정책의 한 가닥으로 회관에도 떡 꼬물이 떨어지니, 그 또한 보이지 않는 무언의 싸움이 대단터라 어딜 가나 유별난 사람 있듯이..
2021.09.10 -
회상‥
어둠이 내린 거실 소파에 파 묻혀 길 건너 아파트 창문을 바라보니, 하나 둘 불이 켜진다. 따스하다. 노을이 지고 까무룩 해지면 어느새 스산해지는 것이 계절의 변화가 실감이 나는 듯.. 건너편 베란다에 켜진 주황 등 불빛을 한참 바라보다가 그 옛날의 어설프기 짝이 없던 내 자취방이 생각이 났다. 하고 싶은 공부가 있었지만, 가난한 농가에 비비고 있어 봐도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닌지라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생의 첫 알바를 시작했다. 핀 보이가 넘어진 핀을 세팅 기계에 올려주던 그 옛날 볼링장에 라인마다 앉아서 점수 계산을 해주던.. 근무시간 때문에 집에서 출퇴근이 되지 않았기에 쾌재를 부르며 시작한 자취생활 그해 겨울은 또 왜 그리 추웠던지.. 잠깐 돈을 벌어 내가 하고픈 걸 하고야 말겠다는 생각..
2021.09.03 -
그니 생각 ‥
황순원의 소나기 속.. 소년이 앙큼 발칙했던 소녀에게 안겨주었던 마타리꽃! 흙탕물 내려가는 도랑가에 노랑 코스모스랑 노랑나비... 다시 만난 유홍초야! 안녕~` 오늘은 더 새첩따.. 더디게만 가는 비둘기호에서 내린 채화는 바툰 걸음으로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낮은 코에 항상 누런 등겨 가루가 묻은 정미소 아저씨가 휘돌아진 담벼락 아래 담배를 피워 물고 서 있었다. 몇 걸음만 더 가면 그니의 집이다. 낡은 양철 대문이 군데군데 녹이 쓴 채 열린 마당에 들어서니, 툇마루에서 해바라기 하던 그니가 활짝 웃는다. 그니 곁엔 언제나 막둥이 동생 경은이가 딱풀처럼 붙어있다.. 우린 늘 그렇듯 건넌방에 들어가 방바닥에 엎드린 채 라디오를 들었다. 가만가만 들려 주 듯 그니가 가르쳐준 노래는 `끝이 없는 길` 박..
2021.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