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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 비나리가 되려하다.()

타인의 흔적/너와 나의 간이역엔...

by 비닮은수채화 2019. 5. 18.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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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만 해도 햇살이 보였다.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서니 비가 내리더니 어느새 가지산 골바람을 타고 눈이 되어 창을 흔든다.

볕이 들다가 바람과 눈이 되어 내리는 날씨는 아들의 승가대학 졸업 날짜를 받아 든 내 마음과 꼭 닮은꼴이다.

큰 아들은 우리 집 대들보였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서 박사과정까지 마친 후 중국에서,

대만에서 학문의 깊이를 더해갔다. 중국사를 공부한 아들은 국내 대학의 교수로 거론되고 있었고 좋은 곳에서 중매도 들어와서 어미로서의 핑크빛 꿈을 꾸고 있었다.

몇 해 전, 잠시 귀국했던 큰아이가 스승과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며 상경했었다.

달포가 지났지만 연락이 없었고 휴대폰도 꺼져 있었다.

워낙 착실한 아이였고,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었기에 두루두루 만나서 회포를 풀고 올 것이라는 생각으로 불안한 마음을 애써 잠재웠다.

그 해, 땡볕이 내리쬐던 칠월 스무날, 우편함에 꽂혀 있던 편지 한 통이 우리 부부를 나락으로 끌어내렸다.

발신지는 잘 알려진 사찰이었다. 서너 줄을 읽던 나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팽그르르 하늘이 도는가 싶더니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갔다.

“부모님 전상서, 오랫동안의 소망으로 많이 번민하였습니다. 부처님께 귀 의하여 포교활동을 하며 좀 더 가치로운 삶을 살고 싶습니다...중략 ”

하룻밤을 뜬 눈으로 새우고 달려간 절에서는 아들을 보여주지 않았다. 삼대가 적선을 하여야 가문에서 중이 나온다는 말로 우리를 회유하려고 하였다.

우리가 좀 체 돌아갈 기미가 없자 아들을 데리고 나왔다. 아들은 죄인인 양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러나 집으로 가자는 말엔 완강히 거절하여 속수무책이었다. 살아오면서 이처럼 무력한 적은 없었다.

절문을 내려오며 작은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밤인데도 천 리 길을 득달같이 달려와서 큰 아들을 데리러 갔다.

그러나 만날 수가 없었다. 가족들의 거친 항변에 겨우 종무소로 나온 큰 아들이었다. 맙소사! 하룻밤 사이에 삭발을 하고 행자 승복을 입고 있었다.

작은 아들은 울부짖었다. 죄인 닦달하듯 몰아붙이는 동생에게 한마디도 못하는 큰 녀석과 흥분을 삼키지 못하는 작은 녀석을 보는 가슴은 아리다 못해 짓이겨졌다.

대만에 있는 짐을 가져와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에 책은 이미 대학에 기증을 했고 옷이랑 소지품은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왔다고 했다. 아까웠다.

돈만 생기면 책을 사는 녀석이기에 내가 중국에 갔을 때도, 대만에 갔을 때도 책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있었다.

세상 무엇보다 책을 아끼던 아들이었기에 이미 가족들의 만류도 소용없음을 알았다.

절에 들어 온지 한 달 남짓인데 손이 헤지고 습진이 돋아났다.

하루 종일 일을 하며 수행이란 이름으로 다독이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렸다.

남편은 자식도 내 것이 아니라 세상에 와서 빌려 쓰는 것이라고 나를 달랬다.

내 것도 아닌 것을 내 것으로 알고 살아 온 것이 죄가 되어 이리도 아팠다.

돌아오는 차 속에선 쓰린 속 감춘 채 속울음만 삼키는 남편임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목 놓아 울었다.

아들의 행자 승 생활이 끝나갈 즈음 우리는 이사를 했다. 삼십 년이나 정들었던 집과 이웃들이다.

승복을 입은 아들을 본집에 들일 수 없어서 이사를 했지만 묵은 정을 떼는 것은 참으로 힘이 들었다.

아직도 아들의 출가를 알리지 않았고 나는 모임에 참석을 하지 않아 오해를 받기도 한다.

신 새벽이면 멀기만 한 불혹의 살점 하나로 나는 명치부터 아렸다.

삭풍 부는 동지섣달에는 새벽 버스에 눈을 박으며 중얼거렸다.

저 버스만 집어타면 늙은 햇 중을 볼 수 있는데, 산중 얼음물에 마음 베이지는 않았는지,

살 에는 새벽예불에 두 귀는 무사한지, 눈도 귀도 먹먹해진 어미는 길에다 안부를 물었다.

그 애물단지가 오랜만에 세상 집에를 왔다.

귀가한 승복을 다림질 하는 아린 모정이 회색장삼 위로 방울방울 번졌다.

채식으로 허약해졌을 속을 다스리려고 등심과 낙엽살, 제비추리도 넘치도록 구웠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대던 모습에 얼마나 흐뭇해했던 지난날인가,

그러나 줄어 든 것은 채소 반찬과 김 한 쟁반이다. 먹성도 입성도 이미 속가를 벗어났다.

오래 머물지도 못하고 등짝엔 바랑 가득 어미 눈물만 지고 떠났다.

시큰거리는 것은 저도 매한가진지 한 번 쯤 돌아보련만 끝내 뒤통수만 남겼다.

부모가 사력을 다해 말리던 그 길을 타고 난 제 길처럼 잘도 가지만 나는 미련에 통째로 젖어 허우적댔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게 인생이다.

내가 중 어미가 되리라 상상이나 했던가?

잦아드는 햇살로 나의 삶도 한 뼘 남짓 남았을 뿐 그리 길지 않음을 안다.

아들의 졸업식에도 동참하여 축하해 주리라. 꺼진 횃불이어도 자식은 가슴에 담아야 한다.

나는 법랍이 낮은 아들의 성불을 위해 기꺼이 비나리가 될 것이다



2018년 시니어 문학상 당선작

울산시 울주군 .. 김 순향


블로그 벗님이신

지우당님의 글 보러 갔다가

너무도 울림이 커서 옮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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