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계절이 오면 너무도 사랑하는 감나무이다.
가을이 다 가기 전에 떠나야 해! >
< 엄니가 주신 수국이 마지막 꽃송이를 틔운다
고맙다. 늦게라도 찾아와 주어서....>
해 질 녘마다
건너편 아파트 지붕 위로 새들이 분주하다.
마치 하루를 바삐 보내다 저녁나절에 가족이 단란하게 모이듯
그들만의 언어로 하루를 마감한다.
날마다 마주하는 풍경임에도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된다.
아이가 독립해 나간 뒤에도
늘 비워두었던 방에
이즘엔 자주 책상에 앉아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잊혀져갔던 트라우마가 다시금 고개를 내민다.
남쪽으로 난 베란다쪽엔 도로 쪽이라 시끄럽기는 하지만 맘은 편하다.
아이방 책상쪽으로는 복도 창 너머 산도 하늘도 구름도 보여 좋기는 한데
복도를 지나는 인기척이 나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며 창을 닫아 버리게 된다.
아이가 아주 어릴적이었는데
기차가 지나다니던 달동네에 살다가
집 뒤편으로 아파트도 들어서고 새 도로가 생기고 까리한 주택단지도 들어서게 되었다.
궁핍한 살림살이가 조금 나아질 무렵이라 새 동네로 이사 가게 되었는데
2층엔 주인집이 살았었고 1층 안채에 한 집과 뒷문 쪽으로 두어 집이 세를 들어 살게 되었다.
뒤로 돌아져 있던 우리 집은 뒷문이 가까웠고 뒷집은 지대가 높아 바위를 쌓아 올린 축대로 이루어졌었고
한 편으로 새로 집을 짓는 중이라 밤이 되면 으쓱할 정도로 한적한 곳이었다.
그날따라 남편은 출장 중이었고 어린 아들은 잠이 들었는데
콜라가 먹고 싶던 난, 밤길에 나서는 게 내키지 않아 참으려는데
어느새 중독이 되었는지 잠이 오질 않아서 불을 켜고 그즈음 유행하던 니들 포인트 자수를 놓고 있었다.
문단속을 하고 선풍기를 켰지만, 공기가 답답해서 방범창이 되어 있으니 창문을 조금 열어 둔 채
라디오를 켜 두고 열심히 자수를 놓다 보니 새벽이 넘어섰다.
조금씩 도안을 따라 자수를 놓던 나는 순간 느낌이 싸해져서 창문을 바라보는데
밖은 어둡고 방 안이 환해서 분간이 잘 가질 않아 고개를 숙이는 순간
소름이 돋으면서 다시 창문을 바라보니
시꺼먼 동그라미 형체가 반쯤 가려진 채 방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너무도 놀란 나머지 벌벌 떨면서도 어떻게든 쫓아 버려야겠다는 생각에
" 불이야! 불이야! 불이야!~"
정신없이 소리를 지르며 잠자던 아이를 깨워서 끌어안으며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야속하게도 1층 사람들은 아무도 소식이 없었고
2층 주인집 아저씨가 몽둥이를 들고 뛰어 내려와서 창문을 들여다보면서
울 아이 이름을 부르며 안심하라고 부르는데도 정신없이 울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비 내리는 날이나
하늘 고운 날이나 상념에 젖을 때는 창을 열고 한없이 하늘을 바라보다가도
발자국 소리만 나면 겁에 질려 창문을 닫아 버리는
나 자신이 조금은 가여운 생각이 든다.
굳은살 뒤엔 말랑한 속살이 있듯 , 어둡던 트라우마 터널을 지나쳐
속살거리는 가을 바람결에 나를 맡기고 이 계절을 맘껏 만끽하며 살아가고 싶다.
새들은 어느새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고
텅 빈 지붕 위로 노을이 가만히 내려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