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안의 가장 큰 요주의 물건? 은
정체모를 깜장 봉다리다.
직장으로 집으로 동동거리다 보면, 자칫 블랙홀에 빠져들기 쉬운 게 바로 냉장고가 아닐까?
덤벙 데는 아이방에 들어서 잔소리는 자주 하면서도
내 영역 공간을 가끔 둘러보면 귓불이 빨개질 때가 있다.
맘먹고 냉동실부터 털어내고
힘들게 닦아낸다.
내용물들이 거실 바닥에 널브러진다.
역시나 정체모를 깜장 봉다리가 수두룩하다.
일단 싹 다 베껴내다 보니,
재작년 묵은지 세 봉다리..( 요건 야외에서 삼겹살 구워 먹을 때 쓰려고 했는데... 깜장 봉지에 쌓여 뭔지 모르고 넘어간 듯...
섬진강 재첩국 한 봉, 엄마 쪽 밭에서 일궈낸 풋고추를 먹기 좋게 썰어 한봉 다리,
마늘은 다져 살짝 얼 쿠어 한 번씩 먹기 좋게 칼집 넣어 한봉 다리,
밥에 얹혀먹을 구수한 울 콩 한봉 다리,
작년 겨울에 동생한테 좋다고 엄마랑 두부 만들고 남은 비지 한봉 다리,
친정 엄니께서 쑥가루를 넣은 쌀가루를 많이 보내줬다고
직장 동료가 준 그 쌀가루를 혼자 송편 빚어서 냉동실에 얼려두었는데 그것도 그대로..
가지 오가리 한봉다리, 영양가 골고루 든 미숫가루 대빵 큰 두 봉 다리..( 요건 울 성현이 아침식사 )
해마다 무청 시래기 삶아 우려내어 껍질 벗겨내고
된장과 갖은양념으로 버무려 한 번씩 먹기 좋게 얼려주시는 울 엄마표 시래기 나물 한봉다리..
요걸 한봉 다리 냄비에 넣고 자작하게 물어 부어 멸치 몇 개만 띄우면
구수한 시래기 찌개가 된다.
버릴 건 버리고 내용물이 훤히 보이는 봉지나 플라스틱 통에 담고 이름표를 붙이고
냉동실 문짝에 출석표처럼 나란히 적어두었다.
꺼내서 요리한 것들은 체크표를 해주는 센스...
냉장실 역시도
뭐가 남은지도 모른 채 또 사고 또 사고하다 보면 청소 때마다 못쓰게 되는 부식거리들...
미련 없이 버릴 건 버리고 냉장고 문짝에도 출석표를 찰싹 붙인다.
풀썩 암 생각 없이 장 구르마 끌고 나갈게 아니고,
냉장고에 출석표를 쓰윽 훑어보고 메모장에 체크하고 나가기로 작정한다..(훔~ 므 언제까지 요랄지 두 모르지만...
냉장고 털이에서 온 알토랑 같은 잡수익은...
친정 엄니 표 김장김치가 달랑달랑해 심란하던 차에 재작년 묵은지 세 봉 다리씩에다
내가 좋아하는 시래기 한봉 다리, 재첩국 한봉 다리..
언젠가 인간극장에서 본 맛객님이 공구한 갓김치다.
공구할 때 글이 생각난다. (조미료에 익숙한 우리들 입맛에는 어쩜 맛없다고 생각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들지 않고 소량으로 진정한 우리네 어머니의 손맛으로 만든 갓김치이다 라고..)
배달되어 온 갓김치를 맛본 순간 맹맹하니 그다지 입맛을 돋우지 못해 냉장고 안쪽으로 밀려난 그 갓김치가
외면된 채 홀로이 곰삭아 얼마나 맛나던지... 지금도 입가에 군침이..
조미료라고 가끔 찌게에 소고기 맛나 살짝 쓰는 것뿐인데 어느새 나도 울 식구들도 길들여져있나 싶어 그때부터 쓰고 있질 않다.
묵은지 꺼내어 해동시켜 썰고 돼지고기도 듬성듬성 썰어 넣고
들기름 살짝 두르고 달달달달 볶아
자작하니, 물을 붓고 끓이다가 웬만큼 끓으면 양파를 채 썰어 위에 끼얹는다.
훔훔 곰삭은 김치 내음과 구수한 돼지고기 내음과 어우러져 후각으로 먼저 맛보는 이맛!
그 기다 엄마가 준 김장김치 양념을 가지고
야채실에 남은 잔파를 한 움큼 다듬고 잔파 머리 부분을 뜯어 버린 채 멸치액젓으로 살짝 절인 뒤에
김치 양념을 버무려놓으면 아주 맛난 파김치가 되어 미각을 돋운다.
오늘 식단은 묵은지 돼지고기 찌개와
파김치이다...
어때요?